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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년 58세

(세종7. 을사) 6 26일 사직상소(辭職上疏)를 올림. 내용은 "재주도 덕도 없이 녹봉만 허비하고 어진이의 등용 길만을 방해하였을 뿐으로, 더욱이 혹심한 가뭄으로 재앙을 당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꾸지람에 대신코자 한다." 는 요지이었음. 임금이 허락지 아니하고, "부왕(父王) 때부터 이미 중대한 임무를 맡아 왔는데 어찌 물러가 쉬려고 하는가," 하였음.

 

7월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북경에 갔다, 10 27일 돌아옴. 명나라  문종황제(文宗皇帝)의 승하를 진향(進香)하고, 인종황제(仁宗皇帝)의 등극을 하례 하였음.

 

12  22일 사헌부의 탄핵을 받음. 금령(禁令)을 두려워 하지 않고 도총재 이순몽(李順夢)의 집에서  김구덕(金九德), 안순(安純), 정효문(渟孝文) 김소(金邵), 박규(朴葵) 48인이 모여 풍악(風樂)을 잡히며 술잔치를 벌였기 때문임.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번에 모여서 술을 마신 자들은 다 사리(事理)를 아는 조사(朝士) 들이며, 또 정사를 잡고 있는 대신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어떻게 아름다운 명예가 되겠는가."  라 하다.

1424년 57세

(세종 6. 갑진) ()을 당하여 정고(呈告)중에 있었다, 고 하였는데 누구의 복 인지는 알 수 없음.

1423년 56세

(세종5. 계묘) 3월 령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회시(會試)를 주관하여 울산교도 이종의(李從義) 33인을 뽑음.

 

1422년 55세

(세종4, 임인) 1월 한양성(漢陽城)을 토성(土城)에서 석성(石城)으로 개축하는 공사를 이르킴. 개국정사좌명공신철성부원군(開國定社佐命功臣鐵城府院君)에 봉해짐.

 

5월 태상왕(태종) 승하로, 국장도감도제조가 됨."

 

8<농상집요>를 인용하여 해묵은 대소맥(大小麥)을 종자곡으로 사용케 함.

봄 장마로 가을에 종자곡으로 사용할 대소맥이 모자라게 되었는데 "농상집요의 곡식종자를 소장하는 법에, 묵은 보리는 대소 두가지 다 종자로 사용할 수 있다." 라고 한내용을 계하여, 호조에서 여러도에 공문을 발송, 관청에 있는 대소맥을 모두 종자곡으로 사용케 함.

 

10월 구휼관(救恤官)을 긴급히 강원도와 평안도에 보내게 함. "봄부터 시작된 장마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계하여, 강원도에 의정부사인 권맹손(權孟孫), 평안도에 한성소윤 이숙치(李淑?)를 보내어 긴급히 구휼하게 함.

1421년 54세

(세종3, 신축) 10 13일 도성수축도감도제조(都城修築都監都堤調)가 됨. 태상왕이 허물어져 있는 도성을 걱정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며, 이원(李原)등에게 이르기를, "도성을 수축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사람들이 원망하게 될 것이나, 내가 그 괴로움을 담당하고, 안전한 것으로 주상(세종)에게 내려 주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원(李原)이 대답하기를, "도성은 집의 울타리와 같은 것이니, 금년에 벼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었음으로 수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고 바로 도성수축도감을 두게 됨

12월 좌의정(左議政)이 됨.

1419년 52세

(세종1, 기해) 1월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가서 왕위승습을 사례하고 4월에 돌아옴. 상왕은 떠나는 사신에게 초피, , 옷을, 임금은 의관과 신발을 내리고, 동 부대언 유영(柳潁)에게 명하여 연서역정(延曙驛亭)까지 전송하였음. ()나라 문황제(文皇帝)는 사신의 모습이 헌걸 웅대하고 만인중에 우뚝함으로 기이하게 여겨, "황수재상(黃鬚宰相) 후일에도 다시 오게나." 하며 작별을 아쉬워 하였음(사가집 묘지명

1418년 51세

(태종18. 무술) 1월 계문(啓聞)하기를 ""보충군(補充軍)은 모두 병조에 속하여 번잡하므로, 각 영()에 나누어 주고, 병조에서는 통제하고 고찰 한다면 부오(部伍)의 법이 바로잡혀질 것 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도다 이법은 매우 좋다." 하고 곧 시행함.

 

4월 전의감(典醫監)의 의원을 구제 함. 임금이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성녕의 죽음은 명()이 아니었다." 하니 계하기를 "목숨이 길고 짧은 이치는 실로 하늘에 관계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너그러이 하소서, 진실로 죽을자라면 비록 의원(醫員)이라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수일 후           임금이, "이 원 이 마음속에 품은 바를 숨기지 아니하고 진달(陳達)하였으니 가히 정직하다고 할 것이다." 하고 참형으로 조율된 양홍달(陽弘達), 박거(朴居), 조청(曹) 원학(元鶴)등 의원의 죄를 경감하여 다시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줌.

 

6 2일 이조판서가 됨.

6월 3일 세자 제(提)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함

6 4일 우의정(右議政) 겸 세자부에 오름.  

8 10일 세종 즉위.

8 11일 우의정 령경연사(領經筵事)가 됨.  

11월 호피(虎皮) 한 벌씩을 삼정승에게 내림. 겨울 조부 이암묘지명(李嵒墓誌銘)을 조성하여 묘전에 매설함. 비문은 목은 이색(李穡)이 찬하고, 글씨는 권홍(權弘)의 서주(書舟), 가로 55, 세로 109, 두께 6cm의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하였음.

1417년 50세

(태종17, 정유) 4월 무과복시(武科覆試)를 시행하여 전선생(田善生)28인을 선발함.

 

5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음. 공사연음(公私宴飮)을 금하는 때에 이원, 김승주, 박신, 성발도, 윤곤, 하경복, 김점, 이춘생, 유연지, 서진, 정환, 윤수, 김상직, 정인지 등이 동소문 밖에서 공무를 수행하다 술자리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임. 임금이, "헌사의 탄핵은 옳으나, 대신들이 잠깐 동안 밖에서 술 마신 것을 어찌 감히 죄 주겠느냐" 라고 하였음.

 

5월 판우군도총제부사가 됨.

 

농상집요에 있는 양잠방(養蠶方)을 뽑아내어 우리나라 말(理語)로 판간(板刊)하여 전국에 시행됨. 대제학 이행(李行)이 농상집요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양잠을 경험하였더니 수확이 보통 때의 배가 되었기 때문임.

 

6월 강원도에 조전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를 보내게 함. 임금이, 바다에서 물러가지 아니하는 왜선(倭船)을 방비할 계책을 물으니, 계하기를 "적은 욕심이 많아 이익을 얻지 못하면 "떠나려고 하지 아니하여, 방비가 없는 곳으로 들어 올 것이므로, 무용(武勇) 있는 1인을 조전첨절제사로 삼아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여, 남두량을 파견하였음.

 

7  모시 1필과 매 1()을 하사받음.

9월 의정부찬성(贊成) 이 됨.

1416년 49세

(태종16. 병신) 1월 조관(朝官)의 관복제(冠服制)를 정하게 함. 조관의 제복을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계하여 시행케 함.

 

강무(講武)를 간편하게 시행토록 함. 사간원에서 청하기를 "가뭄에 흉년이 들어 올 봄의 강무(講武)를 중지 하소서" 하니, 대사헌 이원이 청하기를 "춘추의 광무는 정지시킬 수 없고,

다만 원행을 마시고, 시종(侍從)과 일수(日數)를 줄여 잠시 행차 하였다가 돌아오소서" 하니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일은 모두 간편함을 따르겠다" 하였음.

 

3월 판한성부사가 됨.

5월 의정부 참찬(參贊)이 됨.

5월 병조판서가 됨.

10  강무(講武) 에 말 한필을 하사 받음.

겨울 청백리(淸百吏)에 록선(錄選).  (淸選考)

조선조 정승으로 청백리에 록선된 재상(宰相) 17명임.(청선고)

1415년 48세

(태종15. 을미) 6월 예조판사가 됨.

9월 절식자(絶食者)를 구휼(救恤) 하게 함. 흉년으로 세전(歲前)에는 관고(官庫)의 곡식을 꾸어주고,  세후(歲後)에는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무상으로 도와 줄것을 계하여 임금이 옳게 여겼음.

12월 세번째 대사헌이 됨. 

(태종14. 갑오) 12월 조정(朝廷)에서 대언 한상덕(韓商德)의 진언에 따라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우리말(理語)로 번역 판각하여 책으로 만들어 전국 향곡(鄕曲)에 반포 함. <농상집요> 1349 6월 조부 행촌 이암(李嵒)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우리나라에 소개된 최초의 농업기술서 이며, 행촌공은 1353년부터 1358년 여름까지 춘천(春川)에서 친히 <농상집요>를 실험재배 하였음.

 

곡산군 연사종(谷山君延詞宗)의 집 문과 마을 입구에 정표(旌表)하여 효행을 칭송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할 것을 계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름

1413년 46세

(태종13. 계사) 7월 동북면도순문사가 됨. 모상이 끝나지 아니하였음에도 의정부에서 청하였음. 동북면은 관내에 영흥 길주가 있다 해서 영길도(永吉道)라 하다가 함길도 함경도로 고쳐 부르게 됨. 10월 영길도 도순문찰리사로 홍원(洪原)에 현감(懸監)을 두도록 함.

11  비단, 명주를  1 필씩 하사 받음

1411년 44세

(태종11. 신묘) 5월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짐.

8 26일 모친상을 당함. 조정에서 빈소에 쌀 20, 종이 100권을 부의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제사를 내림. 장례(葬禮)를 마치고 상문온 호정(浩亭) 하륜(河崙) 정승의 유별시(留別詩)에 이어, "한양의 남쪽 물가에 모시고 돌아서려하니, 풀밭은 더욱 푸르러 보이고, 당년 팔십의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려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 라 하였음.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집 원주 법천사기에, "절의 동편에 석상과 자그만 비석이 있어 살펴보니 묘가 셋인데 모두 표시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본조(本朝)의 정승 이원(李原) 모친의 분묘요, 하나는 태재(泰齋)의 묘인데 그 아들 승지 윤겸(允謙)이 뒤에 묻혀 있었다." 라고 기록했음.

   

1410년 43세

(태종10. 경인) 3월 강원도 동북면순문찰리사 겸판순금사사가 되어 탐관(貪官) 조호(趙瑚)를 국문함.

8월 공신유사(功臣有司) 가 됨.

1409년 42세

(태종9. 기축) 2월 경상도 도관찰사로 태조진용(太祖眞容)을 계림(鷄林 현, 경주)에서 서울로 모셔옴. 모사(模寫)하여 완산부(完山府, 현 전주)에 봉안키 위함이었음.

 

3월 태조의 영정을 받들고 계림으로 돌아감. 모셔오고 돌아갈 때 각사(各司)의 관원 1인 씩이 숭례문(崇禮門) 밖으로 나가서 맞이하고 지송(砥送) 하였음.

 

10월 강원도 동북면순찰사가 됨.

 

11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轅接使)에 추천됨. "서북면도순문사가 치보(馳報) 하기를, 중국 사신 해수(海壽)가 의주에 이르러, 이유 없이 성을 내며 목사 박구(朴矩)의 옷을 벗기고 판관을 결박하니, 행색(行色)이 급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의정에 이르기를 "만약 재상 중에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사람을 원접사로 삼으면, 중국 사신이 독기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하여 조정에서 이원(李原) 을 보내기로 추천함.

1408년 41세

(태종8, 무자)2월 요동(遼東)에 가서  명나라에서 돌아 오는 세자 양녕을 맞이함.

4월 임금의 금강산 행에 같이 감.

5월 태상왕(태조)승하. 빈전도감판사가 됨

7월 경상도 순찰사(慶尙道 巡察使)로 나갔다가, 경상좌우도 도관찰사 겸령상주 목사가 됨.

1407년 40세

(태종7, 정해)1월 한성부사에서 파직됨. 전일 대사헌시, 간원(諫院)의 정청에 아전(衙前)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이미 들어와 있던 아전을 이속(吏屬) 수십명을 보내어 힘으로 끌어낸 일로, 탄핵을 받음.

 

7월 왕명으로 민무질(閔無疾)의 죄를 질문함. 민무질이 아우 무구(無咎) 및 신극례(辛克禮)와 함께 종친간의 이간을 꾀한 사실이 알려져, 영의정 이화(李和義安大君)등이 민무질등의 죄를 청하였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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