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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06-07-23 06:24
 작성자 최고관리자
 글제목 석주 이상룡 (石洲 李相龍)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안동댐 조정지와 중앙선 철길 옆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 중종 14년(1519년)에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지은 아름다운 옛집으로 고생 이씨의 종택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지도체제를 바뀐 뒤 첫 국무령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이다. 요새로 따지면 대통령의 생가나 다름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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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있다. 일제가 집의 맥을 끊으려 집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로를 놓아 아예 집을 없애려는 것을 동네 주민들이 반발하여 이 정도에서 그쳤다고 한다.
 
 
 
 
 
 
 
 
 
이 집의 운명도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같이 기구하여 석주선생이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위해 세 번이나 판 것을 고성 이씨문중에서 매번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
 
또 고성 이씨의 종택이지만 사당에는 조상들의 위패가 하나도 없다. 1911년 50여명의 식솔들과 함께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기 전에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하시며 위폐를 전부 땅에 묻고 떠났기 때문이라 한다.
 
 
왕산 허위,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삼대 항일 명문가인 석주 선생 집안은 직계 삼대뿐 아니라, 아우와 조카까지 합치면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해방 후, 그 후손들이 이승만 정권, 군사 정권 아래서는 애국자의 후손으로 대접받기는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아 입에 풀칠하기 위해 석유통을 메고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기 위해 심지어 고아원에 갔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 문화재인 고택에서 하숙이라도 하게  민원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삼대가 구차하게 산다’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수십 년간 폐가로 방치되다 2003년부터 고택체험장으로 일반인도 묶을 수 있게 되었다.
 
 
 
 
목조 대문을 열고 돌계단을 오르면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인 군자정이 나타난다. 이 곳은 선비들이 대청마루에서 문학과 강학을 하던 곳이다. 군자정 내부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인 임청각의 편액과 이상룡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지금은 중앙선철로의 방음벽에 막혀 잘 보이지 않지만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변과 영남산의 풍경은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150m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탑인 전체 높이 17m의 신세동 7층전탑(국보 제16호)과 고성 이씨 소종가인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중요민속자료 제 185호)이 앞뒤로 같이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1858년 (철종 9년) 음력 11월 24일 경북 안동에서 이승목과 부인 권씨 사이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에게 배움을 받고 명가의 후예이자 정통 유학자로서 손색없는 학문적 수업을 닦았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에 서서히 침략의 손길을 뻗쳐오고 있었으나 그런 속에서도 임청각(선생의 생가)의 서재에 묻혀 서책을 벗삼아 생활하던 선생의 청년기는 비교적 평온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민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여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 행동하는 척사유림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눈뜸과 참여는 1905년 을사조약을 맞아 1만 5천금을 투자,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코자 하는 계획으로 계속 되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선생은 무기의 열세, 근대적 군사훈련의 부족 등으로 인한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고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때마침 인근지역의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유림적 인사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자 이에 합류하여 1907년경 계몽주의자로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이상룡 선생의 나이 50세였다.
   안동의 전통사회에서 명가의 후손으로 이미 뚜렷한 입지와 명망을 얻고 있던 선생이 지천명의 나이에 새롭게 자신의 의식세계를 전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이는 선생의 사상이 구국의 차원에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전통유교적 사고의 바탕에서 새롭게 밀려드는 서구의 신사조를 흡수함으로써 동양이냐 서양이냐의 극단적 양자택일을 떠나 이 둘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선생이 이렇듯 혁신된 유림의 행보를 걷게 됨에 따라 안동지방 특유의 친족적 연대감으로 인해 이 지역 집단개화의 선두에 자리잡게 된다. 1908년경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어 대한협회 중앙본부가 점차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자 본부에 통렬한 비판을 가해 구국계몽운동이 갖는 본래적 모습을 지키고자 했다. 계몽운동은 어디까지나 구국의 방편으로 활용될 때 그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신민회에서는 조국의 망국사태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와 황만영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선생은 이에 찬동, 1911년 1월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 채 중국으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이미 50이 넘은 고령에 자신의 삶이 어우러진 고향, 안동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결심하고 이를 주저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선생의 결단은 결코 범용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가도가도 드넓은 벌판만이 이어지는 땅, 바람찬 간도땅에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였다. 이회영· 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개척을 시작하였다.
   우선 동지들과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였다(간도에서 벼농사는 우리민족이 처음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리의 옛땅, 부여·고구려·발해 등 선조들의 웅대한 기개가 어린 곳에서 1,000여 년이 지나 다시금 조국광복의 꿈을 심어갔던 것이다. 경학사는 단순히 이주민의 자치단체만은 아니었다. 이주민의 경제적 안정과 법적 지위 보장 등에 힘쓰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군사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의 전위대를 이루는 독립군 양성에 착수하였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과 한족회로 변천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루어 갔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다.
   3·1독립운동의 함성이 전세계의 잠자는 양심을 두드리던 1919년(3·1독립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와 터어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교훈이 되었다) 한족회는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군정서 독판(최고 총수에 해당)을 맡아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해 갔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에서 무엇보다 뜻있고 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한 점이다. 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조직된 군사통일촉성회에 참가, 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통합의 방안을 협의하였으며 1923년에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대표 약 120명이 모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한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 등 4명을 대표로 파견하여 각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조정과 단합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기대와는 달리 임시정부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자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대표들을 소환하여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선생은 국외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중국 동북삼성 지역의 군사통합에도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1922년 6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여 각기 개성이 다른 독립군 조직을 묶어, 통군부를 조직하였고 이를 다시 확대 개편하여 대한독립군단 등 소위 8단 9회(17개 독립운동단체)의 거중 조정에 성공, 통의부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궁극적 전위대인 독립군의 군세 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일반적으로 볼 때 완고하고 확고하게 자기 세계를 지켜왔던 유교의 본고장 안동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선생이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독립운동의 방안에서 각기 개성과 주장이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전통적 유가적 생활속에서도 서구의 신사조를 흡수 통합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의 이러한 줄기찬 노력은 독립운동계에서 선생의 위상을 그만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확고한 독립운동의 방략을 잃지 않았다. 즉 조국독립의 방안은 무력항일투쟁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준비론·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선생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산업교육우선론과 아울러 독립전쟁론이었다.
   조국광복운동은 결국 일제 무력과의 싸움이었고 이를 위해 선생은 그다지도 독립군 조직, 즉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의 결집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미 의병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두 가지 독립운동 방안의 장단점을 터득하고 있었다. 의병운동의 한계였던 근대적 군사력의 미비와 계몽운동의 한계인 힘의 부족을 통감한 선생은 이 양자의 통합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임무를 스스로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립된 이후 자체정비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대통령에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박은식 선생은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임시의정원에서는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중추였던 선생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다시금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곧추 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북삼성 지역의 김좌진·김동삼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라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뜻과 같이 이룩되지는 못하였다. 상해와 간도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3부 :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국민부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룬 채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거두었다.  50여 년에 걸친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계몽운동·독립군 등 당시 가능한 모든 독립운동 방안을 섭렵케 하였고 이는 선생의 폭넓은 인품을 반영한 것이었다.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유족과 국가보훈처 관계자들로 구성된 유해봉환반에 의해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96년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0. 9. 13. 80면만에 환국하는 석주공의 유해- 현손 昌洙(3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