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정희(庭禧)이요 자는 내길(乃吉)이며 매운(梅雲)은 그 호이다. 공은 참판공의 십오대손이며 모헌공(慕軒公)의 십삼대손이 되시고 옥계공(沃溪公) 휘(諱) 담(潭)의 십대손으로 신사년(辛巳年)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경북(慶北) 인동(仁同) 외조부 장의원(張儀遠)공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향리 청도군매전면 명대에서 성장하였다. 그후 대구 광명학교를 졸업한 후 공은 뜻이 높고 기개가 강직하여 사람을 대함에 너그럽고 인자하시었다. 공은 한말의 국운이 기울어져 감을 보고 애국애정(愛國哀情)의 강개심으로 삼십세때 경술년(庚戌年) 한일합병의 망국의 통한을 당할 시 공과 동파인 이십이세 연상인 족손 독립운동가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공을 만나 감화를 받고 석주공의 지시로 울산의 독립운동가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공을 만나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청소년 교육과 애국사상 고취에 힘쓸 뜻을 세웠다. 이듬해 신해년(辛亥年)에 토지등기가 시행되어 측량을 할 때 청도 모헌공파 종중소유로 내려온 유호연지(柳湖蓮池) 이만육백일평을 경북지사는 국유라하고 연지주변 전답소유자 김용희는 자기소유라 하며 소송을 제기하므로, 공은 청도 모헌공파대표로 천거되어 족친 종옥(鍾玉), 명기(明基), 정철(庭轍), 제족친의 보조로 칠년간 응소하여 문중소유로 승소 확정 하는데 공을 남겼다.
공은 독립운동의 국내연락 거점으로 임자년(壬子年)에 박상진공과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는 무역상을 개설하고 만주 북경 상해등지의 해외 망명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갑인년(甲寅年)에는 윤치오(尹致旿)공을 도와 한미흥업공사를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를 도와 부산에 백산상회를 개설하게 하여 해외 독립운동단체의 자금 지원을 도와 힘썼다. 을미년 칠월 십오일 시회를 가장하여 생존의병 장병 및 독립운동자 등 이백십명이 대구달성공원에 모여 항일결사투쟁을 결의한 대한광복회 조직대회에 참가하고 이듬해 병진년(丙辰年)에 동지 박상진공의 아들 박응수(朴應洙)를 사위로 삼아 독립운동 동지와 혼인으로 결속하고 그이듬해 정사년(丁巳年)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외 몇몇 동지로 하여금 왜적 관리들이 강제 징수하여 수송하는 세금 팔천칠백원을 경주 광명리 길목에서 습격 탈취하여 보관하게 하고 박상진과 함께 상해로 망명을 기도하던중 그해 12월 19일 박상진외 수십명 동지가 왜적에게 체포되어 사형, 무기등 중형을 받게 되자 박상진의 구명운동을 그 아버지 박시규(朴時奎)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왜인 두산만(頭山滿), 미영절표손일(未永節俵孫一),중야정강(中野正剛)등 당시 일본정계의 막후실력자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신년(庚申年)에 청도명대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건립하여 사재를 후학교육에 힘쓰시던중 신유년에 석주공의 지령에 따라 위장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북도평의원에 당선되어 일본 시찰 때 일본의 자유주의자, 국수파낭인(國粹派浪人), 인도주의자등 정계 재계의 실력자를 방문하여 박상진등 동지들의 구명을 적극 설득하였으나 박상진등 오명은 사형, 이명은 옥사, 이십삼명은 무기로 되자 공은 식음을 전폐하고 비분의 날을 보내다가 임술년(壬戌年) 심일월 십구일 조선의용단 사건으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삼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끝에 병인년(丙寅年) 칠월 출옥하여 옥고에서 얻은 신병으로 고생하면서 일경의 요시찰인으로 가택수색과 예비검속을 6회는 당하는 박해를 받다가 을유년(乙酉年) 팔월 십오일 해방을 맞이하여 광복회와 유림 경북대표로 반공 반탁운동에 헌신하였다. 을미년(乙未年) 졸(卒)하니 향년 75세 이였다. 공의 독립운동에 공이 지대함으로 국가에서 1968년 3월1일에 광복공로표창과 1977년 건국공로표창을 받았다. 묘는 청도군 매전면 온막동 명대월봉산(月峯山) 건좌(乾坐)에 안장되고 정부에서 공의 묘전비(墓前碑)를 건립하고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朴永錫) 박사가 비문을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