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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06-07-23 06:23
 작성자 최고관리자
 글제목 해학 이기 ( 海鶴 李沂)
公의 諱는 沂요 字는 伯曾이며 號는 海鶴 또는 質齋이다.
해학(海鶴)은 그의 호이며, 질제(質齋), 재곡(梓谷), 효산자(曉山子) 등의 호를 쓰기도 하였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1848년(현종14년)에 김제군 성덕면 대석리에 태어났다.

해학은 천품적인 기질과 총명이 있었다. 칠척장신에 빛나는 눈동자, 뛰어난 기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에게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스스로도 영웅에 지지 않겠다는 용기가 있었다. 일곱 살에 서당에 입학하여 아홉 살에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우다가 집안 형편이 몹시 가난하였기 때문에 서당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주가 뛰어 난데다가 배우기를 좋아했던 그는 12∼3세에 칠서(七書)를 독파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은 별다른 스승없이 독학으로 공부한 것이지만 뛰어난 시재는 15세에 향시(鄕詩)에 나아가면서부터 그의 재주와 이름이 멀리까지 떨치게 되었다.

해학은 당시에 이름난 문장으로 알려진 이건창(李建昌)과 황현(黃炫), 이정직(李定稷), 왕사부(王師夫), 왕사찬(王師瓚) 형제들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 있어서도 그들은 서로 백중을 겨루었다. 이건창이 쓴 질제기(質齋記)에서 보면 해학의 문장은 비단결같다고 하였으며, 석정이 쓴 해학시문서(海鶴詩文書)에서는 "내 요사이 백증의 글씨를 보면 더욱 변박기려(辯博寄麗)하여 오직 뜻가는데 로 쓰되 범상치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얼핏 보아도 놀라울 정도이며 또한 백증의 글에는 아름다운 빛을 풍기면서도 여기에는 욕염(欲厭)의 뜻이 없다. "고 하였다.

해학(海鶴)의 문장은 당나라 시대의 이름난 문장가 유자후(柳子厚)의 문맥이 완연하고 기교가 없는 것이 석정 자신의 문장으로서는 미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남방의 웅대한 문장가인 황현과 백중으로 본다고 하였다. 황매천의 제 이해학문(祭 李海鶴文)에서 보면 "해학은 하늘이 낸 뛰
어난 재목으로 웅매초려(雄邁抄驪)한 기질에 혼기변박(魂奇熱博)한 문을 가졌다. 그의 학문은 앉아서 담론한 것이면 곧 서서 행한다. 그의 뜻은 국왕을 높이면서도 백성을 비토 하는데 있다. "라고 하였다.

매천은 해학의 천품적인 기질과 문장, 학문, 사상의 뛰어남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특수한 재주를 가지면서 교분이 아주 두터웠다. 그것은 다만 시문(詩文)만을 즐기는 교우가 아니었다. 그들은 학문의 방향이나 시국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상면에서까지 뜻이 서로 통하는 벗이었다.

해학은 학문의 과정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서 전통적인 도학자들의 폐습을 절감하고 유학이 공리적이며 고식적인 굴레를 벗고 보다 실용적이면서 진취적인 실학으로써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전북 지방에서는 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알려진 간재(艮齋) 전우(酪愚)가 수천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해학은 이들의 도학을 근본으로 반대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도학이 남긴 공리와 형식, 사대 봉건적이면서 시국을 알지 못하는 폐쇄주의로 당시와 같은 정치, 경제, 교육의 혼란을 야기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해학은 유학이 진정한 유학으로서 광정구국(匡正救國)의 학문이 되려면 앞서 이 지방에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 잠곡 김육(金堉), 다산 정약용(茉山 ???T若鏞) 등이 개척하여 놓은 실사구시 이용 후생(實事救是 利用厚生)의 실학을 토대로 하여 시대의 시국에 부응하는 새로운 학문으로 전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지역에 유정학풍(柳???T學風)의 뒤를 이은 새로운 실학적 풍조를 일으켰는데, 그가 교유한 서울의 이건창, 장지연, 호남동향의 황현, 왕금색,왕사찬, 박향래, 박극유, 이정직, 최보열, 정인기, 양백규, 나주의 나인영, 오기호, 영남의 최현달, 최주사 등은 선생과 더불어 사상적으로 뜻을 같이 했던 동학(同學)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 과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첫째는 가세가 곤궁하여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하였으며, 둘째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고 지도해 줄 사우동지(師友同志)를 얻는 일이었다. 그의 나이 30세가 넘어서는 어려운 생활을 꾸리기에 관심을 두어야 했고 34∼5세부터는 생활근거지를 구하여 김제, 대구, 순창 등지를 전전하기 10년, 44세에 친구 황매천의 주선에 따라 구례로 이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학문과 세무에 뜻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 선생의 구국활동(救國活動)

1894년(고종 31년) 동학혁명의 기치가 오르자 그는 고부에 나아가 동학당수 전봉준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는 이 기회에 군중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부정부패의 소굴인 민씨 일당의 간적을 물리치고 주상을 받들어 국권을 새롭게 하자는 제의를 전봉준에게 하였다. 이에 전봉준도 찬의를 표하였다.그러나 전봉준은 당시 남원에서 옹병(擁兵)하고 있던 김개남(金閼南)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해학은 김개남을 찾아갔으나 면접을 거절, 오히려 해학을 해하려 하였다.이로 말미암아 해학은 동학군에 의한 부패정치의 척결과 혁신의 희망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 운봉 여원치 전투에서 대패한 동학군의 패잔군이 구례까지 몰려와 파괴와 약탈 행위로 백성을 괴롭히자 해학은 군민을 규합하여 저들의 행위를 방해하는데 전력하였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정치를 어지럽히던 민씨 일당이 제거되고 입헌정치를 하게 되자 해학은 곧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가 1895년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정치를 바로 잡는데 우선 전제(圖制)를 개혁하고 도량형(度量衡)에 대한 일정한 규정과 공사세제(公私稅制)의 질정(質正)이 급선무라는 내용의 '전제망언(圖制妄言)'이라는 개혁안을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제시하였다. 이 안이 채택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뒤 정부에 양지위문(量地衛問)이 설치되면서 여기에 관심이 높은 해학을 양지 위원으로 임명함에 따라 그는 충남 아산에서 토지 측량을 하여 지적과 세정을 바로잡는 체험을 직접하게 되었다.

그가 전제망언을 제출한 다음해에는 안동부(安東府)의 관찰사 이남규(李南珪)의 막료가 되어 모병과 군사 조련을 담당, 의병토벌에 참가한 일도 있다.이것은 해학이 위기에 처한 당시 국내 사정을 감안하여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수구적(守舊的)인 혁명을 반대하였던 그의 뜻을 엿볼 수 있다.

1904년 일제는 노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침략의 뜻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는데, 이에 선생은 국내에서의 항일운동보다는 국외에서 국제적인 외교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1905년 미국 포스머스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나아가 한국에 있어서 일본이 침략의 저의를 규탄하고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뜻을 세웠다. 이 계획은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윤주찬(尹柱瓚) 등이 논의하여 사절을 보내려는 결의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여권을 신청하였으나 당시의 외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이 힘을 쓰지 않고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미계획에서 실패한 그들은 차선책으로 이 해 8, 9월에 일본에 건너 갔다.처음 계획은 일본 천황 유인(裕仁)을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으려는 것이었으나 이에 응해주지 아니하므로 일본 천황과 일본 정계의 요인들에게 일일이 서한을 보냈다. 이 가운데에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에게 두차례의 서한을 보내어 그의 야욕을 통박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온 해학은 한성 사범학교의 교관으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906년경에는 장지연,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필봉으로 민중의 계몽에 힘썼다.

해학은 '호남일보' '조양보(朝陽報)''야뢰보(夜雷報)'의 서문에 국민의 자각을 심각하게 외쳤다.

한편 선생은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수 등 우국동지를 규합하여 기울어진 국사를 바로 잡는데는 무엇보다도 먼저 궁 내부의 간당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첫행사로 을사 오적을 살주(殺誅)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나인영, 오기호 등으로 조직된 자신회의 취지서를 해학 자신이 지었다.

그 내용은 흉적을 제거해야 할 대의와 단결의 필요성을 천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성취되거나 」안되거나 간에 국민의 대표로써 관에 자수할 자현상(自現狀)까지 작성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오적참간장(五賊斬奸狀)'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하수인들의 실수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선생은 주모죄로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고종의 특사로 귀향에서 풀려나왔다.선생은 때때로 고종에게 글월을 올려 정부안에서 잘못되는 일을 바르고 간절하게 상소하곤 하였다. 특히 '논 일인소구진황지소(論 日人訴求陳荒地疏)'라 해서 4차에 걸친 상소는 1904년 6월 노일전쟁이 한참 진행중에 있을 때에 일본 공사대리 추원수일(萩原守一)이 일본 상인 장삼등길랑(長森藤吉郎)과 밀모하여 산림원야(山林原野)를 50년기한으로 장삼에게 대차해 줄 것을 강요한 것에 대한 내용이다. 이진황지의 대차강요(賞借强要)는 일제가 한국 침략의 전초로서 용인할수 없는 것이므로 4차에 걸쳐 상소한 것이다.

선생은 당시 정부 요인들에게 제도개혁을 건의하고 일본과 러시아의침략에 대한 방략(方略)을 논하여 그들의 맹성을 촉구하기도 했다.해학은 자강회원 계정수(桂延壽), 이정보(李延普), 김효운(金孝雲)등과 함께 '단학회(壇學會)'를 발기하였다.단학회는 대종교(大宗敎)와 같이 국조 단군을 신봉함으로써 민족의주체의식을 고취하려는 일종의 종교운동으로 발족하려는 것이었다.
이 단학회의 창립 취지와 단약삼장을 초안한 해학은 1909년 음력 3월16일 대영절(大迎節)에 단학회를 창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비관하여 한성의 어느 여사(旅舍)에서 음식을 전폐하기 10여 일만인 1909년 5월 25일 그의 나이 63세 때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 선생의 사상(思想)

선생은 학문이란 문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행하여야 할 것을 글자로 표현하는데 불과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선사부모일 효(善事父母日孝)'라고 한문으로 기록한 것을 배우는 것이나,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효도라 한다. "라고 국문으로 기록한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또 이러한 글을 배웠다 해도 효도를 하지 않으면 글을 배운 의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학문이라는 것은 글자를 배우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생활하는데 꼭 알아야 할 것을 배워서 알면 곧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칠 수 없고 어디까지나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학자들이 상위에 있다면 성명(性命)만을 논하고 하위라면 문사(文辭)에 전력하는데 이들이 모두 첫 이름을 추구할 뿐이요, 실사(實事)를 불현(不顯)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학문이 높은 분이다 하여 정치의 한 자리에 임직하면 엉뚱하게 일을 낭패시켜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선생의 학문관은 가정과 국가에 유용한 학문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 생활에는 제 몸의 인격을 바로 갖는 도덕의 가르침도 있어야 하지만, 가정과 국가에 유용한 학문이 될 수 있도록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학, 종교학 등이 있어야 하고, 농자는 농학을 배워야 하고, 상업을 하는 자는 상학을 배워야 하며, 공업을 하는 자는 공학을 하여 실제로 후생에 이용되는 학문이라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을 한꺼번에 모두 갖출 수는 없기 때문에 소질에 따라 전공을 할 수 있는 전문대학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실학 사상이었다.선생은 국가란 가정과 사회의 집 단체들이 집결되고 군신과 관과 국민이 모두 모여서 이룩되는 것인데 가정이나 사회가 한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듯이 국가도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여 주권재민을 말하였다. 즉 국가의 주권이 오직 군주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국민 하나하나에 있다는 것이다.

옛날과 같이 양반 상민의 차별이 있는 사회, 직업의 귀천을 차별하던 사회관념을 갖는다면 국제적 위치에 있어 한국의 평등을 주장할 수 없는 스스로 천대 받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차별 관념을 일소하여야 하며, 이러한 문제들은 학교를 세워 거기에서 강구 함으로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해학은 또 교육혁신의 7개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① 평등한 의무교육의 실시 ②교육제도의 개선 ③민족의식에 입각한 정신교육 ④ 체육, 덕육, 지육의 삼원칙에 의한 교육실시 ⑤ 실사구시, 이용 후생을 목적으로 한 분과별 적성 교육의 실시 ⑥ 한문식 재래교육의 인습 타파와 국문교육 ⑦ 홍보방식에 의한 교육이다.

해학은 만민평등의 정신에 입각한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이와같이 선생은 천품적인 재주를 가졌으며 학문에 있어서 한말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신학문의 개척자이고, 정치, 교육 및 새로 도입되는 과학의 분야에 까지도 세밀히 탐구하여 시세에 맞고 국가가 시급히 요구하는 교육의 혁신을 부르짖는 애국자였다.

그에게는 사후 1968년 3월 1일에 건국 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1975년 8월 8일에는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선생은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시의에 따라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을 제시하는 여러 가지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들을 모아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해학유서(海鶴遺書)'라는 전문 12권의 책자를 발간하였다.
 
 
 
 
 
 
 
공의 휘(諱)는 기(沂)요 자는 백증(伯曾)이며 호(號)는 해학(海鶴) 또는 질재(質齋) 재곡(梓谷)이다. 헌종 14년도 무신년(1848)에 아버지 휘(諱) 탁진(鐸振)의 장자로
김제(金堤) 만경(萬頃)에서 나시어 한학을 배우셨다. 공은 총명과 재조(才操)가 뛰어나고 특히 문장과 시에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호남의 삼재(長興의 존재(存齋) 위백규(蘶伯圭).구례(求禮)의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공(公))라 불리었다.  
   공이 한학을 전공하시고는 수백년간 유학계를 지배하여 온 성리학을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존중하는 과학적 객관주의적 학문태도)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로하는 실학을 연구하여 유형원(柳馨遠) 정약용(丁若鏞) 등과 학통을 이어받았다. 조선말기 민씨일당의 부패정치를 증오하던터에 갑오년 동학난이 일어나자 고부(古阜)의 정봉준을 찾아가 당군(當軍)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일당을 타도하여 나라를 바로 잡자고 권하여 합의를 보았으나 남원(南原)의 김개남(金介男)이 반대하여 구례(求禮)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이때 동학군이 구례에도 침공하여 일반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니 공은 고을사람 수백명을 이끌고 백성에 대한 횡포를 막았다. 광무3년(1899) 량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 토지를 측량할 때 양지위원(量地委員)이 되어 충남 아산의 토지를 측량하였으며 고종9년(1905) 노일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 동지 나인영(羅寅永)등과 미국으로 건너가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열강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반대로 여권을 얻지못하고 일본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천황과 정계요인들에게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서면항의를 제출하였다.
  이해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니 할수 없어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민중계몽에 헌신하고 당로자(當路者)인 어윤중(魚允中), 신엽선(申葉善), 조병목(趙秉穆), 박재순(朴齋純), 김가진(金嘉鎭), 윤용선(尹容先), 이도재(李道宰), 민영기(閔泳綺)등에게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경계와 방비및 제도개혁, 위정자의 맹성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광무11년(1907) 나인영(羅寅永)등 동지 10여명과 모의 을사오적을 암살하기로 하였으나 권중현(權重顯)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성공치 못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시어 서울에 돌아와 호남학보를 발간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진력하시다가 망국의 통분을 풀 길이 없어 기유년(1909) 7월13일 서울의 여관에서 단식자진하시니 수(壽)는 62세이시였다. 공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한말에 나시어 실학의 학통을 이어받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상의 선구자이고 실천적 애국자이다.
공이 남긴 해학유서(海鶴遺書)가 국가편찬위원회에서 김상기(金庠基)박사 주선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서문으로 한학자 정인보(鄭寅普)박사는 12권의 저서에 대하여 공의 일생을3기로 나누어 권일(卷一) 전제망언(田濟妄言)은 토지제도개혁을 논한것이고, 권이(卷二)급무8제의(急務八制議)는 정부편제, 세제(稅制), 전제(田制)등 시급히 개혁해야 할 8조의개혁방안을 논한것이다. 권삼(卷三)에서 권십이(券十二)까지는 논변(論辨), 소진(疎秦), 서간(書簡), 서발(序跋), 기(記), 전(傳), 시(詩), 부(賦)등 인데 내용이 모두 해박한 경륜과 구국일념이라 하였다.
   광복후 1968년 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고 선영에 묻힌 공의 묘를 정부에서 1975년 8월 15일 광복절에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묘번(墓番) 159호)에 이장하였고 전북도민은 향리 전주시완산공원(全州市完山公園)에 공의 애국유적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