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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암공파 2006 江原監營祭 참석/ 2006. 10. 14 / 원주>
  글쓴이 : 용헌공파 날짜 : 07-01-21 23:50     조회 : 7548    

강원 감영제 참행기(江原 監營制 參行記)
이세웅(李世雄), (29세, 고성이씨 사암공파 회장)/ 2006. 10. 11~15.

一. 머리말

  2006. 10. 11 - 15까지 강원도는 원주시 주관(감원 감영제 위원회)으로 제25차 강원 감영제를 실시하였다. 감영제(監營祭)는 지난 조선조 우리 옛 선조의 관가의 일상생활과 모습을 되 보여주는 아주 뜻 깊은 전통행사이다.
  강원 감영제는 제1일(10/11)에는 동악제. 치악산 산신제. 취타대행진. 수문법 교대식을 시작으로. 전통혼례. 민속경기. 강원도 마당놀이 한마당(강릉학산 오독떼기). 치악의 소리와 감영유희로서 끝냈다.
  제2일(10/12)에는 취타대행진. 수문변 교대식. 민속경기. 조선시대무술시범. 강원도마당놀이한마당(줄타기). 소리난장. 퓨전 국악연주로 끝났으며, 제3일(10/13)에는 수문병 교대식. 강원도마당놀이한마당(원주 매지농악). 감영의 숨결 그 바람 따라-관동800리로 끝내었으며, 제4일(10/15)에는 기로연회. 민속경기. 전통궁중 다법 시연. 역사 속에서 역동하는 원주편이 있게 되었다.
  바로 이 행사에서 우리 고성이씨가문이 참행(參行)하는 행사로서, 그 내용은 <관찰사 순력행사>. <관찰사 고유제>. <관찰사 연회>의 순이었다.
  근세조선조 5백년간 행 강원 관찰사(觀察使)의 수만 하여도 500여명이 실할 것이며, 관찰사가 상시 근무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한다.
  관찰사(觀察使)란 직위(職位)는 종2품의 문관직으로서 각도에 1명씩을 두었으며, 도백(道伯). 감사(監司). 방백(方伯) 등의 별칭이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라고 칭하다가, 세조 12년(1466년)에 관찰사(觀察使)로 고쳤다,
  관찰사의 직권(職權)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는 것이 상례이다. 
  관찰사(觀察使)는 도백(道伯)으로 고려때 안렴사(安廉使)라고도 칭하였으며, 용헌 이원(李原)도 전라도 안렴사를 1392년도 역임한바 있으며, 그의 부친인 평재 이강(李岡)도 경상도 안렴사를 1363년도에 역임한 바 있다. 
  우리 고성 고성이씨 문중은 원주시의 [감영제 실시계획에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고, 지난날 강원 감찰사를 역임한 직계 후손으로서 참여하게 되었는 바, 당시 1486년49세 나이로 청파 이육(李陸.1438-1497)과 이육의 손자 이찬(李澯.1498-1555)도 1226년 6월6일 같은 나이인 49세 나이로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 받게 된다.
  휘(諱) 찬(澯)은 육(陸)의 2남인 군수(정4품) 험(嶮)의 자(子)이다.
  여기 500여기(餘旗) 관찰사 기치(旗幟) 중에서 후손인 노구의 필자가 청파 관찰사의 깃발을 들고 1시간여의 취타행진이었지만, 피로도 모르게 보무당당한 선조의 면모를 여러 측면에서 추모하여 보았다.
  이날 청파공 이육(李陸)과 수곡 이찬(李澯) 관찰사 두분의 직계 후예(後裔) 70여명 등이 참관하여 영광스러웠던 지난날의 선대의 위용을 보는 듯 하였다.
  이 글에서 조선 중기의 고성이씨의 대표적 인물로 꼽을만한 청파 이육의 및 수곡 이찬의 사적의 약사와 선대에 관하여 관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세보]를 저본으로 언급하여 보기로 한다. 다만, 독자 제현은 필자가 일반적인 문헌의 관행에 따라 작성과정에서 존칭을 생략하는 결예를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二.  강원도 관찰사 청파 이육(李陸)과 수곡(守谷) 이찬(李澯)

1. 가계(家系)

1) 강원감사 청파 이육의 직계 선대(直系先代)

  청파 이육은, 시조 철령군 호부상서 이황(이황)을 시조로 하여, 고려후기에 명문거족 중의 거족인 고성인 밀직사 판사(정2품) 이인성(仁成.개명,이존비尊庇)을 5대조로 두고, 고려 후기초의 명신 수시중(종1품) 행촌 이군해(君侅.改名,이암嵒)가 고조부이며, 밀직사 부사(종2품) 이강(岡)은 증조부, 근세조선 세종조의 좌의정(정1품)인 이원(原)을 조부, 사암공 이지(墀)를 부친으로 두고 있다.
  그의 선조(先祖)들은 고려가 몽고(蒙古)의 잔혹한 간섭 지배하에서 시달리며 대대로 조국을 수호하다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왜구(倭寇)의 노략질의 병화에서 어려운 고려의 후기를 보위한 애국적(愛國的)이고 기개 높은 인물들의 가문이다.

2) 근세조선 개국 초기 고성이씨 가문의 상황

  고려(高麗)가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1392년에 457년만에 멸망(滅亡)하고, 근세조선(近世朝鮮)이 개국(開國)하여 70여년간 왕권쟁탈과 왕권강화라는 피의 숙청이 있을 때 청파의 조부 철성부원군 양헌공 좌의정 이원(李原.호:용헌. 자:차산)은 철혈군주 태종(太宗)과 더불어 근세조선의 국기(國基)를 다져 왔었다.
  그러나 용헌 이원은 세종(世宗)조에 이르러 정적 참소에 의해 여산(驪山)으로 유배(流配)되어 울화병으로 병사(病死)하고 변한국부인 전주최씨마저 3일만에 병사하게 되니 가세(家勢)는 급전직하로 크게 위상(位相)이 기울게 되었다.
  아 . 그 원통한 심경이 짐작되지만, 현군 세종(世宗)은 개국초를 선대(태종)와 더불어 국기(國基)를 다젔던 명신(名臣) 용헌(容軒)의 기개(氣槪)와 지혜(智慧)를 종종 조정의 신료 앞에 아쉬워하며 두둔과 칭찬했던 기록도 있다. . . . . . .
  이 당시 용헌 이원의 슬하에는 [7남 6녀]로 시조 후 13세 계열인, 장남 둔재공 이대(李臺)는 동부대언(정3품 승지)으로 36세, 2남 호군공 이곡(李谷)은 30세,  3남 좌윤공 이질(李垤)은 27세, 4남 이비(李埤)는 24세,  5남 이장(李場)은 21세였었다.
  그리고  6남 참판공 이증(李增)은 12세, 7남 사암공 이지(李墀)는 11세의 소년의 고아로서 어느 곳에 기거 성장하였는지 모른다.
  서랑(壻郞)은, 조선초기 최고 유학자 서산인 주부 유방선(柳芳善.1388-1443:*유기의 아들), 문화인 부정 유급(柳汲1391-?), 파평인 첨지 윤삼산(尹三山.1406-1457.*성종비 정현왕후 외조부), 전의인 현감 이굉식(李良幹.0000-?), 세조의 좌익공신 1등 안동인 좌의정 권람(權擥.1416-1465*좌찬성 양촌 권근 손자), 장수인 청도군수 황종형(黃從兄.1423?-? *황희손자)로서 용헌(容軒)이 선택한 인물(人物) 서랑(壻郞)들이다.
  용헌이 가신 세종 11년(1429년)후, 10여년의 세월이 소리 없이 흘러가면서, 세종(世宗)은 갔는데, 1443년(세종 25년) 장남 둔재공 이대(臺)가 중추원 부사(종2품)로 별세하게 되니, 용헌 생존시에 무과에 급제한 차남 호군공 이곡(谷)은 대호군(정3품)에 이르렀고, 3남 좌윤공 이질(垤)은 한성 소윤(정3품), 4남 동추공 이비(埤)도 추밀원 동지사(정3품)에 이르렀으며, 5남 병사공 이장(場)도 병사(정3품)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모두 태종(太宗)이 왕권강화를 도모할 때 무과(武科) 급제한 인물들이다.    6남 이증(增)은 1452년 31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영산현(靈山縣)에 출사(出仕) 부임하였고, 7남 이지(墀)는 1451년 32세에 음사(蔭仕)로 전직(종9품)에 나갔다가 문종(문종)이 병으로 훙서하여 1452년 단종(端宗)이 즉위하여 군기시 녹사(종9품)가 되었다. 

3) 계유정난(1453)과 세조 즉위(1455년)

  1453년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발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의 배경에는 태종(太宗)때부터 왕권강화(王權强化)라는 왕실(王室)과 신권신장(臣權伸張)은 조정(朝廷)의 중신(重臣)간에 어린 단종(端宗)을 빌미로 깊은 갈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왕실(王室)을 대표하는 측은 단종(端宗)의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고, 조정(朝廷)을 대표하는 측은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이었다.
  단종 2년 계유(1453년10월10일)에 수양대군측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격살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니 이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지금의 혁명(革命)이다.
  이 계유정난에서 주역을 맡은 인물은 권람(權擥.1416-1465)과 한명회(韓明澮.1415-
1487)었으며, 이 둘은 용헌의 큰 사위 유방선(柳芳善.*개국공신 유기의 아들) 문하에서 만난 문인(門人)이고, 유방선(柳芳善.1388-1443)은 권람의 조부이자 용헌의 자형(姊兄)인 양촌 권근(權近)의 문하생이다. 물론 권람(權擥)은 용헌의 4째 사위이고, 5째 사위 윤삼산(尹三山.1406-1457)은 세조(수양대군1417-1468)의 비 정현왕후(正顯王后)의 당질로서, 후에 성종의 비 정희왕후(正熹王后) 외조부(아들:윤호)가 된다.
  이들 안동권씨 대부분과 파평 윤씨 대부분은 모두 계유정난에 참여하였음은 물론, 그들의 처남인 고성이씨 문중에서도 대거 참여해 좌윤공 이질(1400-), 동추공 이비(1402년-). 병사공 이장(1409년). 사암공 이지(1420년-) 등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세조(世祖)는 즉위한 2년(1456년2월7일)에 이원(李原)에게 공신녹권을 환급할 것을 명하는 조치를 행하여, 고성이씨가 명멸의 기로에서 중흥기를 마지하게 되었다.
       
2. 문광공 청파 이육(文光公 靑坡 李陸)

1)  청파의 업적 개황

  휘(諱) 이육(李陸)은 이 시대를 살아간 인물로 그의 자(字)는 방옹(放翁), 호(號)는 청파(靑波)로서 시호(諡號)는 문광(文光)이다.
  이육(李陸)은 세종 20년 무오[1438년-연산(燕山 4년 별세]에 탄생하였는바, 그의 부친 사암공 이지(李墀)는 19세 무관(無冠)의 시절이었다.
    이륙의 조부 이원(原)이 일찌기 9년의 재상을 역임하고 조선조를 반석위에 올려 놓게되는 시점에서 태종과 세종의 총애로서 말년을 보내는 중 서서히 일기 시작한 훈구세력간의 갈등 조짐에서 정적(政敵)의 참소를 당하여 여산 유배지에서 62세로 별세하여 삭탈 관직된다.
  이육의 부친 이지(墀)는 이육의 조부 이원(李原)이 좌의정이라는 재상의 반열에서 있던 세종 2년에 7남으로 탄생하였고, 11세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다.
  이렇게 불우한 가문의 우울한 시기에 유년시절을 맞이하여 사실상 난국에 봉착한 가세로 말미암아 학문의 연마가 어려운 때였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여기에서 사암 이지는 계유정난 원종공신이 되어, 세조의 특별한 독대의 별시에서 문과 정과 2인으로 급제할 정도의 신임을 갖게 되었고, 가문의 중흥기를 마지하게 되고, 이륙은 이렇게 다시 재기되는 가문 속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계기가 된다.
  이육은 정보(정몽주의 아들)의 외손이고, 문종 2년 임신(1452년)에 15세로 사마시에 급제하고 22세에 진사를 급제한 후, 지리산에 3년간에 들어 가 사적(고기.古記)을 탐독하는 등 학문을 닦아 명성이 높았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에 이륙은 행촌의 전승된 [단군세기(단군세기)] 등 고기류(고기류)를 소지하고 이를 탐독한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그는 지리산에서 3년간 학문을 마친 후 나와 세조가 온양온천에 행행하여 과거를 보게 되자 여러 사람에게 “ 내 이번에 장원하지 못하면 다시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장담하여 장원을 하였다.
  이렇게 그는 그만큼 자신이 생긴 것이며 10년 갑신(1464년)에는 27세로 온양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학자의 요직인 성균관(成均館)의 직강(정5품)으로 제수되었다.
  온양별시에서는 문인 [계원필경(桂園筆耕)]의 저자 성현(成峴)과 함께 등제하였는데, 후에 그 아들 성세창(成世昌:좌의정)은 이륙의 서랑(婿郞)이 되였다.
  후에 그의 부자 성현(成峴)이 이육(李陸)의 신도비(神道碑)를 찬(撰)하고, 성세창(成世昌)은 이육(李陸)]의 아우 이맥(陌:돈녕부도정,종2품)의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온양 별시 급제 2년 후 세조 12년 병술(1466년)에 29세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급제, 또 2년 후 세조 14년 무자(1468년) 31세로 문과 중시 을과(文科 重試 乙科)에 급제한 조선의 문신이다.
  과거에 5번이나 급제하여 학문이 뛰어난 학구파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온양 별시 문과 급제 후 성균관 직강을 시작으로 세자문학, 예문관 응교(정4품)를 겸직하였다.
 이어서 예종때 사헌부 장령과 예문관 전한(종3품) 겸직, 성종 즉위 원년 기축(1469년)에 32세로 사간원 대사간(정3품), 판결사, 또 성종의 특명으로 당상관 정3품으로 승진 절충장군 호분위 대호군(정3품)으로 좌리원종공신의 호를 하사한 후 장례원 판결사, 성균관 대사성(정3품)을 제수하였다.
  성종 8년 정유(1477년)에 40세로 충청관찰사(종2품)를 제수(* 이때 부친 사암공이 1473년 괴산군수로 부임하여 봉직 중 희귀한 사례의 표본이 되는 것은 다소 기구한 운명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영광과 자긍심이 교차되는 희비의 쌍곡선이라고 할까?
 이때 부친이 1477년 괴산 군수로 봉직 중이었는데 성종은 부친이 장남에게 정무를 보고하는 거북한 고충을 고려하여 사암공을 내직으로 전임을 배려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엿 볼 수 있는 다행스런 미덕을 찬양받게 된다.
  그 후 호조참의와 예조참의를 역임하고 성종 15년 갑진(1484년)에는 형조참의로서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다음해 한성 우윤(종2품)을 제수한다. 바로 2년 후 19세로 1486년에 부친 사암공의 상을 당하고 강원도관찰사, 예조참판(종2품)를 제수 받게 된다.
  성종 21년 경술(1490년) 조공 正使로 明에 다녀와서 다음해 성종 22년 신해(1492년)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이 등극하는 원년 을묘에 다시 고부청시 승습사 부사(告訃請諡 請承襲 副使)로 명(明)에 다녀서 왔는데 조선의 세계를 명쾌하게 답변하여 중국학자들이 사리를 잘 아는 재상이라 탄복하였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 후 경기관찰사, 사헌부 대사헌(종2품), 호조참판, 병조참판, 춘추관 동지사(종2품)를 겸직하였다.
  연산 4년 무오(1498년)에 병으로 61세로 하세하였으니 슬하에 4남3녀를 두고 셋째 딸 서랑은 의정부 좌의정 성세창(성세창)이다.
2) 청파의 형제

(가) 차제(次弟) 이수(陲) ( 1443년 세종 25년 계해 -    ?  )     

  개천 군수 후 손자 병조참판 안광공 명규의 공덕으로 증직이 이조판서이다. 이수는 독자인 순(峋0.은 의고령이며, 손자인 안광공은 무후로 종제인 우당공 이택(현감, 증.이조판서)의 4자 저(지 저石氐)로 별세 후 계자로 삼아 후대를 잇게 된다.
                                                     
(나) 중제(仲弟) 이 습(隰144?년 문종 ?년      -  ?      )

    관직이 군수이며 아드님은 통덕랑 이철부(李鐵富)로 상세한 기록이 없어 생략한다.

(다) 계제(季第) 이맥(李陌. 1453년 단종 계유년-1528년 중종)
      이맥은 1574년에 21세 나이로 사마시에 급제하고, 24년간 채백일사(太白逸史)를 저술한 후 1497년 백형(伯兄) 이육(이육)이 별세한 다음 해 1498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이맥은 성균관 전적, 홍문관 교리, 춘추관 찬수관, 사헌부 장령, 사간원 대사간, 중추부 첨지사, 장예원 판결사, 돈령부 도정, 호조 참의, 돈령부 동지사를 역임하였다.
                                                   
(라) 자매(姉妹)

    자매로서는 매부 밀양인 시정 박항(朴恒)과 함양인 무양 군수 여희령(呂希齡)이 있다.
  이 해는 아우 이맥(陌)이 문과(*1474 사마시에도 급제)에 46세로 급제하여 봉정대부 성균관 전적(정6품)으로 제수 받은 해였다.
  이 당시에 이육(李陸)의 가문은 다시 번성하여 그의 종형 이칙은 이륙의 온양 별시급제보다 2년 전에 장원하였으며 이주는 성종 때 문과 급제하여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 갑자사화에 주살되기도 하였다. 4촌 이주(冑)의 아우 이여(膂)도 문과 급제하고 종손(從孫) 이명규(名珪)도 문과 급제하였다.
  이륙은 모든 학문에 통달하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은 공이였으며 유집으로는 귀중한 청파극담을 남기고, 성종실록을 편찬하고, 인지의 제작, 명나라 천자로부터 백옥저를 하사 받고 학문에 통달하였다.
  1474년에 들어 와 사암공 이지(李墀)는 가문이 중흥되어 선대의 민멸된 문헌의 복원사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공표할 수 있는 것은 이육(李陸)이 주관하여 이원 선생집과 철성연방집을 편찬하였다.
  청파공(문광공)의 신도비 찬명은 유명한 성현이 묘비석을 찬명하였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일은 그렇게 어려운 급제를 여러 차례 실천하고도 결국 참판이라는 지위로 머물렀다는 것은
  “열심히 했다”는 실무적으로는 교과서적으로 훌륭함 뿐 정치적인 감각은 부족했다는 판단이 앞서는 것이 필자의 냉철한 비판이라고 할까? 그 직계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후술한다. 

3) 이륙의 선대의 문헌 복원과 청파극담

  이륙은 4회의 과거 급제를 하면서도 관직에 종사하여 꾸준히 학문에 열의가 대단하였으며 또한 천성이 명민하고 정직하였으며 군서를 많이 알아 청파극담을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옛날 선비의 저술에 있어서는 유배문학이라 하듯이 당시의 선비들은 유배 후에 저술 작품이 이루어 졌으나 이륙은 관직을 종사하면서 저술을 남기는 어려운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건강을 저해하는 요인의 큰 실수를 하게 된 것 같다고 사료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청파극담의 일부를 요약 소개하여 보기로 한다.
  일찍이 이륙의 조부 이원(李原)의 후임정승인 황희(黃僖) 정승은 그의 손자 황종형(黃從兄)이 이륙의 고모부로서 조부 이원의 서랑인바 이륙은 황희 정승의 인품에 관한 기록을 청파극담(靑坡劇談)에서 술회하였다.
 <<황희 정승은 희로를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노복들에게는 한 번도 매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비나 노소들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아니하고 시도 섞여서 같이 놀았다.
 그는 이럴 때마다 웃으며 “노복도 하늘이 주신 백성이다. 어찌 학대를 할 수 있느냐” 하여 항상 자손들을 경계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덧붙여, 황정승(黃政丞)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성정이 관후한 일면이 있는 반면, 그가 영상 고불 맹사성(孟思誠)이 좌상(左相)으로 있을 당시에 김종서(金宗瑞)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을 때 조금만 잘못하면 김종서를 몹시 나무랬다. 혹은 김종서의 종을 벌하거나 서리로 가두어 두는 등 의도적으로 심하게 하여 맹사성(孟思誠)까지도 너무 과하게 병조판서를 나무라고 있으므로 민망하여 그러지 말라고 하였다. “영상대감. 김종서는 일대의 명경(明鏡)인데 너무 곤욕을 주시는게 아닙니까?” ‘모르시는 말씀이요. 나는 김종서를 옥같이 만들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요. 김종서는 성품이 강하고 기가 예리하여 일을 실수하기 쉽소.“ ”그렇지만 과히 나무래시는 것 같으오“ 관대하다는 영의정 방촌 황희 정승은 엄정하고 위엄있는 안색으로 고불 맹사성을 보며 여전히 자기의 고집을 부리었다. ”여보. 좌상대감. 후일 우리가 죽으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오. 아무리 보아도 김종서 밖에 없오. 김종서의 강한 성질을 꺾어 주어 후일의 모든 액을 없애주려고 내가 심하게 구는 것이요.“ 이때야 맹고불도 황방촌의 심정을 알고 손을 잡으며 ”대감이 생각하시는 후일의 큰 생각을 내가 채 몰랐오이다.“하고 감탄하였다.
 고불 맹사성(孟思誠)은 황방촌보다 먼저 별세하였고, 황방촌은 나이 80으로 은퇴할 때 자기 대신 역시 김종서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후일 김종서는 화를 당한 것도 그의 기질에 있었던 탓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당대의 명상들인 맹고불도 덧 붙여 설명하여보면, 고불 맹사성은 우왕 12년에 문과 급제한 후 청백리로 조선에 들어 왔으며 고려 충신 최영(崔塋)장군의 외손이다.
  그는 세종 9년에 좌상이 되었고 청백 단중하여 상신으로 체면을 넉넉히 닦았고 청결 간략하여 국가에서 주는 오래 묵은 녹미만 먹고 단간 방에서 지붕도 비가 샜고 학문 외에 음률에도 정통하여 피리를 잘 불었다.
  방촌 황희는 공민왕 12년(1363년)에 탄생하여 녹사의 관직에 있다가 27세로 창왕 원년(1390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이륙의 조부 이원(李原)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그의 부친 밀직사 부사로 장래가 촉망되던 이강(李岡)이 부친 행촌의 상을 당하여 35세로 요절하던 해 탄생하여 자형 찬성사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이원은 포은 정몽주의 방하에서 18세로서 맹사성보다 1년전 우왕 11년에 문과에 급제해 조선에 들어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고 52세로 태종 16년(1413년) 우의정 61세로 세종 원년(1426년)에 좌의정으로서 국초의 험난한 시대에서 국기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태평성대의 재상이 된다. 그리고 주변의 참소로 유배지에서 별세한다.
 이때에 맹사성(孟思誠)은 세의 의정부 찬성사(종1품)이였고, 황희(黃僖)는 의정부 참찬(정2품)이였으며 이들은 이원의 후임으로 태평성대를 이어 간다.
  연령적으로 보면 이원보다 맹사성이 5세 연상이고 황희는 3세 연상이나 이원(李原)은 이들보다 과거급제나 관직에 있어 훨씬 앞선다(이원 18세 문과급제, 황희 27세 문과급제, 맹사성 27세 문과급제).
  이륙의 조부 이원(李原)은 고려조에서 등제 후 고려가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가 멸망되여 조선조의 관료로 등용되어 개국 초의 무인정사 왕자의 난 등 어수선한 시기에 관료직에 봉직하는 중에 촌각의 여가가 없이 동분서주로 연만하였다.
  그러다가 학문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부 행촌 이암에 관한 저술도 못한 채 노년에 참소로 유배되어 집필의 문헌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
  그리하여 1474년에 들어 와 이육(李陸)은 부친대에도 심오한 학문을 가진 분이 없어 부친 이지의 지시에 의하여 조부에 관한 용헌공 이원선생과 철성연방집이라는 저술을 남겨 후세에 전하게 된다.
  그러나 공표할 수 없는 문헌인 [단군세기]와 [태백진훈]은 사마시에 급제한  이륙의 아우 이맥이 24년간 긴 세월을 두고 복원시키고 46세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춘추관 찬수관 시절에 행촌의 [단군세기]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한 고기(古記)를 보고 깜짝 놀라 1만년 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는데, 괴산 유배시에 이를 정리하여 불후의 저술을 남기니 바로 [태백일사]이다.

三. 강원 관찰사(觀察使) 이찬(李澯)의 생애(生涯)
 
  1)  가계(家系)

    조선이 개국하여 고조부(高祖父)인 조선국 무인정사 정사좌명공신 4등 철성부원군 양헌공 좌의정 용헌 이원(容軒 李原.1368-1429=62세.고려공민왕17년-조선세종12년)과 증조부(曾祖父) 계유정난 원종공신. 좌리원종공신 돈령부 정(증,예조참판.1420-1486=67세.세종3년-성종18년) 사암 이지(思嵒 李墀)에 이어, 조부(祖父) 좌리 원종공신 문광공 참판 청파 이육(李陸) 등도 철성연방집(우리나라 최초의 족보)과 청파극담을 저술하였고, 겸직 춘추관 동지사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외 당대를 같이 살아간 종형(從兄) 숭정대부 돈녕부 판사, 겸 경영. 춘추관 지사 안광공 이명규(李名珪)도 해서. 행서. 초서에 빼어나 행촌 서체(杏村 書體)를 본 받았으며, 종제(從弟) 참판 우당공 이택(이택)도 외교문서에 뛰어났으며, 수곡 이찬(李澯)도 마찬가지로 행촌의 예손으로서 예서. 초서에 뛰어 났다.

2) 이찬의 생애와 시대적인 상황

(1) 이찬의 출생과 성장

  이찬은 연산군 4년(무오년.1498년)에 청파공 이육의 2남 군수공 이험(李嶮)과 영인 광주 정씨(부:부정 정옥)와의 사이에서 독자(獨子)로 출생하였다.
  이해는 조부 참판 겸 춘추관 동지사 이육(李陸.1438년.세종21년생))이 3월 7일에 60세로 별세하였고, 종조(從祖) 이맥(李陌.1453-1528..단종2년-중종24년)이 21세로 사마시(생원, 진사)에 급제하였다. 특히 이해는 사화가 처음 있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있었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여 훈척세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사림파를 중요시 하여 등용함에 따라 사림파 시대(士林派 時代)가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자 훈척세력은 사림파의 제거를 암중모색 중에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를 [조의제문(弔意祭文)]으로 비교하여 세조실록을 편찬함에 일대 반격으로 나왔다.
  이때 사림파로서 고성이씨 중에 이주(李冑)가 김종직 사림파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유배되고, 다음 갑자사화때는 장살을 당하게 되며, 이후 4색 당파로 치닫게 되어 조선의 패망원인이 있게 된다.

(2) 관직 출발

  이찬은 연대의 기록은 없으나,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시험)에 급제한 후, 1523년(중종18년)에 26세로 중종의 친시인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25년에 승정원 주서(注書.정7품)로 제수된다.
  이어서 이찬은 정언, 사적, 이조좌랑, 사헌부 헌납, 사헌부 지평, 병조정랑, 이조정랑을 역임하게 되는데, 이는 중종(中宗)의 하명으로 사정(司正)행위를 충실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피 사정자로서는 집단화 되어 저항세력을 이루게 되고, 이조참판 김안로(金安老.중종 큰사위 연성위 김희의 부친)이 권력을 종횡으로 부리는데 당시 수십 차례의 간언을 하였지만 중종은 거부하다가 결국 유배 파직하게 된다.
  이때 이찬(李澯)이 사간원 지평으로서 사간원의 소임을 다하는 선임 대간들의 대열에 끼어 간언하여 김안로가 파직 유배되어 5년만에 복직되었다.
  그러자, 이찬(李澯)이 오히려 후일 5년간의 유배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이때 김안로 일당의 수차례 이찬 등의 유배 건의에 대하여 중종은 거부하다가 결국 파직 유배하게 되었다.
  중종은 모후 정현왕후 윤비(1462-1530.성종 비)가 용헌 이원의 외손녀이고, 이찬, 이주 등 고성이씨는 용헌의 현손으로 69세로 생존하여 서로 무관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3) 유배중의 생활

  이찬(李澯)은 주로 사간원 및 사헌부와 홍문관 등에서 초관직(初官職)을 보낸 자존심 강한 신진으로서 강직한 성품이었고, 초년간관으로서 선임간관의 소임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531년부터 1538년까지 8년간 유배생황에서 심신은 허약해 득병한 상태였고 김안로(金安老)가 사사되어 이찬(李澯)은 복관되어 간관지과 홍문관직에 봉직하게 된다.
(4) 복관 후의 관직 생활

  이찬(李澯)은 별표와 같이 역임하였다.

(5) 강원도 관찰사 역임

  이찬(李澯)은 1546년(명종 1년) 6월8일에 50세로 한성부 우윤에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강원 병사 및 강원 수사로 제수(除授)받게 되어 힘겨운 무신직을 겸하고 1547년 4월17일까지 1년간 외직에서 다시 내직 한성우윤으로 제수되었다.
  그리고 한성부 좌윤, 중추부 동지사, 개성부 윤인 종2품 관직을 섭렵하고, 1555년에 59세를 일기로 별세하게 되는데 유배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항상 관직생활이 어려운 청백리로 살아갔다.
  조정(朝廷)에서는 이찬(李燦)을 유례없이 보기 힘든 봉조하(奉朝賀)로 제수하여 평생을 조정에서 지급하는 녹봉으로 살게되지만, 사실상 적은 급여로서 여생을 어렵게 살아갔다.
  수곡 이찬(守谷 李澯)선생은 문장(文章)에도 소질이 있었고 학자로서 예서, 초서, 행서(隸書. 草書. 行書)에도 서예가로서 능한 당대의 문신(文臣)이었다.
  아마 조국(祖國)의 강직한 수시중이며 3대 서예가(書藝家)인 행촌 이암(杏村 李嵒)선생을 틀림없이 흠모하였고 서예에 정진한 후예 중의 한분일 것이 분명하다.

三. 맺음말

  역사 속에서 가풍의 자존심은 맥맥히 흐르게 되며 이육(李陸)을 비롯한 이맥(李陌), 이택(李澤), 이명규(李名珪), 이규(李逵) 등의 문사관료(文士 官僚)를 배출시킨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볼 때 한시대의 역사는 간혹 지도자의 한사람이 자리를 지키거나 비울 때 역사적인 사실도 많이 달라짐을 보아 왔다.
  조부 청파공 이육(李陸)은 3번이나 과거를 급제하고 세조 연산군 등 5대왕의 어려운 시대를 봉직하며 내외직을 두루 거친 경륜을 지녀 온 정통적인 관료이다.
  학문이 출중함은 물론 성정도 다분히 정직하여 정도를 걸어가며 왕과 왕실간에서도 신망이 두터웠고 주변의 추종세력도 많아 그 시대의 중심인물이 확연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이러한 인물이 계속 정계에 원로로 머물러 있었을 경우에 정치판도와 시대적인 상황도 많은 변모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였듯이, 같은 강원도 관찰사 이육(李陸.1438-1498)과 이찬(李澯.1498-1555)의 길지 않은 아쉬운 인생 역정의 마감은 숙명적인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찬(李澯)은 조부 청파 이육(李陸)이 별세하던 해에 탄생하였으며, 같은 49세의 나이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가 되었으니 60년 후의 일들이었다. 
  두 분이 좀 더의 수를 누리었을 경우에 3정승 반열에는 능히 승차할 수 있었음을 아쉬워하게 된다.
  이찬 은유난히 강직한 성품과 문재(文才)로서  문희공 이존비, 행촌 이암, 용헌 이원, 청파 이육의 후예로서 손색없고 순탄하지 않은 역정을 거친 인물이다. 
  이 분들은 국난과 정쟁의 와중에서 정통적인 신료로서 정치적인 고난과 고뇌로서 일생을 경유하는 아픔을 겪어 오면 관료와 정치적인 틈바구니에서 결코 순탄치는 못하였다.
  특히 사암공 이지(李墀.증, 예조판서)선조가 끊어졌을지도 모를 명문거족의 “훌륭한 맥(脈)”을 이어 갈 발판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에 백규 이괄(李适) 부원수의 패기 넘친 기개는 오히려 가문의 명예가 훼손당한 결과는 안타까운 통한의 역사적 운명이었다.
  강원도 감영제를 참석하여 두분의 후손인 우리 2명이 행진을 보무도 당당하게 [관찰사의 깃빨]을 들고 40여분의 행진과 30여분의 후속 행사를 마치니 만감이 교차되는 심회를 금치 못하였다.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꿋꿋이 살아갔을 것을 생각하니 우리 후예에게 힘찬 역동의 경륜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봉조하(奉朝賀) 수곡(守谷) 참판 이찬(李澯)의 묘소(墓所)가 세보(世譜)에 의하면, 양주(楊州)에 안장되었다고 기록되어, 그 후손이 충북 보은에서 그 유적의 향방을  알 고자 함에 종중의 협조를 바라고자 한다.
 


사암공파 종중에서는 2006년 10월 14일 역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신 분들을 위해 원주에서 거행된 江原監營祭에 참석하여 고성이씨 어른들의 업적을 높이 기리는 행사에 동참하였다. 여기에 사진 3장을 소개한다.  위: 고성이씨 두어른 (92대 陸字, 162대 澯字)의 피켓을 들고 사암공파 임원 및 종원들과 함께. 중간: 각 성씨 대표들이 순서대로 모여 서 있는 모습. 아래: 새내 가두행진 모습.

[자료제공: 사암공파종중 이세웅 회장]
[정리: 용헌공파종중 홈페이지관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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