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팀이 이기면 재미있고, 지면 재미없다. 그래서 이기면 보고 싶고 지면 보기 싫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물론 이미 그 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팬이라면 조금 다르다. 이기면 기뻐하며 보고, 지면 안타까워하면서도 본다. 그런데 그 팀이 자꾸 지고, 무기력하게 지고, 가망 없는 경기를 계속하면 팬들조차 경기장에서 눈을 돌리는 때가 있다. 재미가 없어서도, 정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가슴이 아파서다. 사랑하는 선수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프고, 관중석에서 보내는 응원이 스스로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 서로를 동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파서다.
물론 아주 관심을 끊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실눈 뜨고라도 공포영화의 무서운 장면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처럼, 암흑기의 야구팬들이란 경기장에서 눈을 돌리고도 소식까지 끊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떤 암흑기에도 팀이 얼마나 지고 얼마나 무너져내렸는지는 대략 알지만, 정작 그 시절 선수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플레이했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큰 사고를 당한 순간의 너무 아픈 기억들이 지워지듯, 야구팬들에게도 이상하리만치 까맣게 잊힌 시간들이 있다.
▲ ?길고 깊었던 암흑기에 이글스는 여러 차례 연패를 경험했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다. 2013년 4월 13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와 LG의 경기. 삭발투혼에 나선 한화이글스 선수들이 9회말 마지막 공격을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2013.4.13
암흑기에 팬들은 어떤 기억을 남기는가
한화 이글스는 유독 길고 깊은 암흑기를 겪은 팀이다. 그 팀의 팬들은 그럼에도 꾸준히 야구장을 찾아 끈질기게 응원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멍든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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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멍든 시간을 함께 버틴 이글스의 팬 중에 한상훈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플레이에 대해 딱히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바로 그가 하필 그 멍든 시간, 길고 깊었던 이글스의 암흑기에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선수였기 때문이다.
199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지명 받았지만 대학을 거쳐 2003년에 입단한 한상훈은 1군과 2군을 오르내리며 프로선수로서의 성장기를 보냈고, 2007년과 2008년에는 백업요원으로나마 1군 붙박이로 시즌을 보냈다. 그때는 이글스가 당연한 듯 중상위권에 머물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을 마치고 돌아온 2011년, 그 팀은 암흑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그 팀을 최강의 반열으로 이끌었던 엄청난 이름값의 레전드들이 우르르 은퇴하면서, 졸지에 팀 내에서 그가 짊어져야 할 역할이 커졌다. 이제 막 본격적인 1군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려던 예비군 1년차 한상훈에게 곧바로 주전 2루수 자리가 주어졌고, 2012년에는 주장의 중책까지 맡겨졌다.
한상훈은 기본적으로 성실한 선수였고, 또 훈련과 경기에 임하는 집중력이 좋았다. 수비력이 깔끔해 팀을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역할을 했고, 또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로 동료들을 다잡고 분발시키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런 유형의 선수들이 흔히 그렇듯 체구가 크지 않았고 그것과 연관된 폭발력이 부족했기에 팀을 바닥에서 끌어올릴 힘은 부족했다. 주어진 조건 내에서 투수와 끈질기게 싸우며 어느 정도의 출루율을 기록하긴 했지만 타격의 재능은 부족해 주자를 불러들여 .수로 연결시키는 역할은 아쉬웠다. 그는 팀을 덜 지게 해주는 선수였지만 이기게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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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흑기 이글스의 버팀목, 한상훈?안정된 수비와 허슬플레이가 한상훈의 특징이었다. 타석에서 끈질기게 버티며 출루하는 집중력도 좋았다. 하지만 타격센스와 파워를 갖추지 못했고, 팀이 승리하는 장면과 연관된 기억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
ⓒ 한화 이글스
덜 지게 만드는 선수
체면이 좀 깎였을 뿐이지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한화는 그 무렵부터 부랴부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흐름을 바꾸려 과감한 투자를 여러 차례 감행했다. 그런데 그렇게 일어난 태풍이 한상훈 같은 '보이지 않는 살림꾼'에게 유리하긴 어려웠다. 2013년 일본에서 김태균이 복귀해 주장 완장을 가져갔고, 2014년에는 FA로 리그 최강의 2루수 정근우가 영입되며 유격수로 옮겨야 했다.
물론 유격수 자리 역시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그해 함께 유격수 한 자리를 나눠 맡았던 것은 공격력이 좀 더 낫고 나이도 어린 강경학이었고, 수비의 완성도와 노련함마저 그에 못지않은 베테랑 권용관마저 영입되자 백업요원 자리도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의 경쟁은 상무 팀에 머물던 하주석이 돌아올 때까지로 한정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한상훈의 전망은 더욱 어두웠다.
2013년 시즌 후 4년간 총액 13억 원의 FA 계약을 맺은 것은, 어려웠던 시절 그가 팀에 해준 공헌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후보로도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는 선수에게 그런 계약이 보호막을 쳐줄 수는 없었다. 불과 2년 뒤, 그러니까 계약 기간을 2년이나 남긴 2015년 시즌 후, 그는 심지어 육성선수 전환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마저 외면 당한 채 방출되며 선수경력을 마쳐야 했다.
과감한 투자에 쓸려나간 암흑기의 버팀목
한상훈은 성실하고 좋은 선수였지만, 특별한 강.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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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흔했다고도 할 수 있는 수비형 내야수였고, 오히려 백업요원으로 머물 때 가장 빛나는 선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가 팀의 중심에 놓였던 시기가 하필 그 팀 최악의 암흑기였기에, 그는 팬들에게 고마운 이름이긴 하지만 접어둔 페이지에 적혀 무심하게 흘러가버린 이름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는 암흑기의 팀이었기에 그만큼 부각될 수 있었고, 나름 거액의 FA 계약도 경험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잘 드러나고 기억되지는 못하는 방식으로, 많은 팬들이 애써 잊고 지워버린 시간동안 추가실.을 막아냈던 그가 아니었다면 이글스는 안타까움을 넘어 팬들의 비웃음을 사는 더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랬다면 결국 더 많은 팬들이 아픈 가슴을 참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픈 기억은 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애써 잊어야 하는 기억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팬들에게는 그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일도 나름 의미가 있다. 이기는 경기도 보고 지는 경기도 보는 것이 팬이며, 이길 때의 기쁨은 지는 경기를 견뎌낸 기억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뻗어나갈 때 오만해지지 않고 곤궁해질 때 무너지지 않는 의연함을 갖기 위해서도, 쓴 약을 참고 먹듯 그 아픈 기억을 곱씹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한상훈은 이글스 팬들에게 그렇게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시간을 가리키는 책갈피와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이견의 여지없이 암흑기를 완전히 벗어난 언젠가, 혹은 그 시간으로부터 충분히 멀찍이 떨어진 언젠가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게 그 시간을 곱씹어보기로 마음먹은 이들이 다시 들춰보게 될 페이지 속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될 이름이기도 하다.
▲ 이글스 한상훈?어렵던 시절의 살림꾼.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 덕에 그는 적지 않은 규모의 FA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웅크렸던 팀이 뻗어나가야 할 때 힘을 보태지 못했기에 FA계약기간 내에 방출된 최초의 선수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 한화 이글스
적혀 무심하게 흘